Episode 5. 리듬을 이루다.
은은한 온기가 타케루의 몸을 감쌌다. 타케루가 천천히 눈을 뜨자, 그는 자그마한 방 안에 홀로 누워있었다. 방에는 살림살이랄 것도 별로 없었다. 단지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인 촛대 하나만이 방안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어떠한 장식도 되어있지 않은, 작고 얇으며 투박한 나무 촛대. 타케루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쓰러지기 전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자신을 보고 한 여자가 달려오는 장면이 쓰러지기 전 남은 마지막 기억이었다. 타케루는 그 여인이 자신을 여기로 데려왔으리라고 짐작했다.
타케루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문밖으로 나가보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리 뿐만 아니라,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배가 고팠다. 그 생각이 머리에 닿자, 꼬르륵 배가 울리는 소리가 잠시 촛불의 빛을 밀어내고 방안을 메웠다. 무딘 칼날이 배를 계속해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허기에, 무엇이라도 당장 먹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문득 비상식량이 떠올랐다. 그의 검은색 보따리 안에는 비록 다 식었을 터지만 배는 채울 수 있는 우메보시 2개가 남아있을 것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짐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좌우 상하를 다 둘러보아도 짐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짐이 없다. 대관절 어찌 된 일이지?....."
식은땀이 그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다. 타케루는 간신히 자세를 고쳐 앉고 곰곰이 생각했다. 잠시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그는 세 가지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첫째, 죽어 저승에 왔기에 짐이 있을 수가 없는 것.
둘째, 자신을 구해준 그 여인이 짐을 두고 온 것.
셋째, 도적이 자신의 짐을 훔쳐 간 것.
타케루는 세 가지의 가능성이 각자 얼마나 일리가 있는지를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그는 우선 첫 번째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는 분명히 살아있었다. 그를 죽음으로 이끌 것만 같은 극심한 허기가, 역설적으로 일단은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는 연이어 세 번째 가능성도 지워냈다. 도적들이 그의 짐을 훔쳐놓고 굳이 자신까지 따뜻한 방 안에서 재워주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깊이 생각해보면 아예 말이 안 되는 얘기는 아니기도 하다.
‘...우선 내 짐을 빼앗고, 나를 살려놓아서 어딘가에 공장에 일꾼으로 팔아먹기 위함이라면?.’
그 생각이 떠오르자,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이유만은 절대 아니어야 했다. 제발, 절대로. 그는 애써 두 번째 가능성이 정답일 거라고 되뇌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여인이었고, 여자 혼자서 나와 짐 모두 들기는 버거울 테니 어쩔 수 없이 짐을 버리고 온 것이 틀림없어. 음. 물론 그렇지.’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아직 세 번째 가능성이 메아리처럼 남아 계속 불안을 일으켰다.
‘...하지만, 정말 도적들의 계획이 아니란 법도 없지 않은가?’
그는 잡념을 떨쳐내려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일단 방을 나가야 정답을 알 수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계속 새장 속의 새처럼 갇혀만 있을 순 없다, 라고 굳게 마음을 먹은 그는 침을 꼴딱 삼키며 조심히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불안함에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 순간,
‘드르륵. 드르륵.’
문이 열리려는 듯 덜컹거렸다. 문고리를 잡기 직전까지 간 타케루의 손이 굳었다. 누군가가 이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다. ‘누구지? 도적? 귀신?’ 두려움에 머리가 얼어버려, 방금 애써 지워낸 두 허무맹랑한 가능성이 다시 타케루를 지배했다. 몸이 벌벌 떨려왔다. 방금까지 배를 찌르던 허기조차 공포에 눌려 느껴지지 않았다.
“아, 이놈의 문은 또 왜 이렇게 안 열려!”
건너편의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치며 발로 문을 차서 밀어내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한 여자가 두 손에 무언가를 들고 문지방을 넘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으아악!”
타케루는 그녀를 보고 크게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그 충격에 초가 엎어지며 탁자에 불이 옮겨붙었다.
“꺄아악!!”
탁자에 불이 붙은 것을 본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팽개치고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윗도리를 벗고선 물이 담긴 양동이에 푹 담근 후 꽉 짜서 부리나케 방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왔다. 천만다행히도 불이 탁자 전체에 옮겨붙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물에 젖은 윗도리를 불이 붙은 탁자 위에 덮었다. ‘취이익’하고 불이 꺼지는 소리가 들리며 뿌연 연기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타케루는 연신 기침을 했다. 어찌 된 상황인지 눈앞이 흐릿하여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연기가 다 흩어질 때쯤 여자가 새 초를 들고 와 촛대 위에 올려놓고선 불을 붙였다.
“놀라셨다면 죄송해요...저희가 돈이 없어서요. 이런 싸구려 초를 쓸 수밖에 없는 점, 이해해 주세요.”
타케루가 보아하니, 공손한 태도의 그녀는 일단 귀신이나 도적은 아닌 듯 했다. 그러나 타케루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런 허름한 곳으로 모시게 된 것도 죄송하고요..”
“저를 왜 여기로 데려왔습니까? 여기는 어디고요! 또 제 짐들은 다 어디에 있죠?”
“아…, 저, 그게….”
말끝을 흐리는 여자의 모습에서 타케루는 그녀가 필히 숨기는 것이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더더욱 큰 목소리로 여자를 쏘아붙였다.
“말하세요! 여기는 어디이고, 제 짐들은….”
‘꼬르륵’
타케루의 배에서 천둥처럼 요동치는 소리가 말의 흐름을 끊었다. 민망함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보이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걸 알 수 있었다. 타케루는 심하게 부끄러워하며 여자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소리에도 비웃거나 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 떠올린 듯 ‘잠시만요!’하고 방을 나가더니 무언가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깨어나시기 전에 확인해 보니까, 짐 안에 우메보시가 있더라고요. 이렇게만 먹으면 맛이 없을 것 같아서, 고명처럼 위에 양념을 더 얹어봤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타케루는 멀쩡한 음식에 수상한 가루를 올리고선 자신에게 그 음식을 권유하는 그녀를 웬 미친 여자 보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내 짐을 마음대로 뒤져놓고 내 비상식량에 뭔지도 모를 것을 올려놓은 다음, 그걸 또 나보고 먹어보라는 거야? 이 미친 여자가 정신이 나갔나! ‘고명’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이렇게 말하며 멱살을 움켜쥐고 싶었으나, 슬프게도 멱살을 움켜쥘 힘도, 크게 말할 힘도 없었다. 게다가 화를 내는 것보다는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눈으로 여자를 욕하며 그녀가 건네준 우메보시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 사이 방 밖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조금 전에 어디서 탄내가 났는데 불난 거 아니요?”
“분명 ‘그 애’가 관리하는 방에서 소리가 났어요!”
사람들의 발소리가 타케루가 있는 방 앞에서 멈춰 섰다. 제일 앞장서서 걷던 사내가 반쯤 열린 미닫이문을 완전히 열었다. 방 안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타케루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방문을 연 그 사내가 고개를 내밀며 타케루를 향해 말했다.
“오, 형씨. 드디어 일어났네? 잠은 잘 주무셨소? 이 아이가 형씨는 꼭 살려야 한다길래,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아주는 걸로 하고 맡겼는데. 별 문제 없지?”
사내가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키가 작은 그 사내는 면도도 제대로 안 하는지 뾰족뾰족한 수염이 보기 흉하게 자랐으며, 짙게 그을린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전혀 문제없거든요! 이제부터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만들 들어가서 주무시고 계셔요!”
여자가 귀찮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녀의 날선 반응에 세 사람은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타케루는 그 말을 듣고 긴장을 조금 놓았다. 그 날카로운 반응이 타케루에게는 오히려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지켜주겠다는 말처럼 들린 것이다.
“이미 잠 다 깼거든. 하여간 너는 경계심이 너무 없어서 문제야. 이러다가 나중에 된통 당하는 수가 있다니까? 그땐 네가 책임질 거야?”
앞장선 사내와 비슷한 키에 마른 몸매를 가진 중년의 여성이 여자를 보며 혀를 찼다. 그 옆 또 다른 사내는 여전히 타케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젊어 보이는 그는 다부진 몸을 가졌으며 매서운 눈, 그리고 사각턱과 중후한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아니 근데, 별 문제 없는 거 맞아? 문제없다면서 저 양반은 왜 밥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냐.”
그 말에 모두가 타케루를 바라보았다. 타케루가 눈물을 흘리면서 입안에 들어간 우메보시를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네 사람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타케루는 입을 멈추고 멍하게 그들을 마주보았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양 서로를 바라보는 상황에, 여자는 당황해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아저씨 아줌마가 너무 부담스럽게 쳐다보셔서 이분이 밥을 못 먹고 계시잖아요! 이만 좀 가세요!”
여자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소리를 지르며 문을 ‘쾅’ 하고 닫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하며 심히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아무튼, 허튼 생각이랑 하지 말고 내일 아침까지 그대로 다시 돌려보내! 그 사람은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야. 일이 잘못되면 도리어 우리가 여기를 떠나야 할 수도 있어!”
중년 여성의 예리한 목소리가 방 안까지 뚫고 들어왔다. 날카로우면서도 우렁찬 목청을 가진 그녀는 ‘내가 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라고 투덜거리며 돌아갔다. 여자는 잔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타케루에게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이해하세요. 저희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당신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맛있어….”
“네?”
“이 우메보시에 도대체 무슨 짓을…!”
타케루는 방금 그 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면서도 음식의 맛을 놓치지 않았다. 손에 남은 우메보시 하나가 보물처럼 귀중하게 느껴졌다. 우메보시 위에 뿌려진 뭔지 모를 알갱이들이 우메보시와 하나가 되어 독특한 리듬을 이루고 이었다. 우메보시를 씹으면서 느껴지는 식감과, 혀에 느껴지는 맛의 향연과, 마침내 식도로 넘어가며 느껴지는 여운과 아쉬움까지. 그는 그 느낌들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우메보시를 맛보는 타케루의 눈에는 붙잡지 못할 찬란한 빛의 가루들이 휘날리는 듯 했다.
‘반드시 이 알갱이들의 정체를 알아내고야 말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남은 우메보시 하나마저 단숨에 해치워 버린 후였다.
“…맞다, 멋대로 짐을 풀어헤친 것은 사과드릴게요. 저희만의 사정이 있어서요. 어쩌다 보니 실례를 범하게 되었네요.”
여자는 말을 마치며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패를 하나 꺼내서 보여주었다.
“이 패는 교토 최고의 음식점 ‘소다 소바’의 직원임을 나타나는 증표잖아요. 저도 거기서 요리 먹어봤어요. 어찌나 맛있던지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었다니까요. 주방장이 좋으신 분이니, 직원들도 틀림없이 좋은 분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분이 직원 관리도 철저하게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패를 본 타케루는 당황했다. ‘주방장’ 패를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직원의 것을 잘못 가지고 왔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자의 말을 듣고 타케루는 두 가지 반가운 사실을 발견했다. 요리의 맛을 안다면 첫인상과 달리 말이 통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사실과, 이 머나먼 땅에서 기적적으로 ‘소다 소바’의 손님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타케루는 자신이 주방장이라고 밝혀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훨씬 더 수월하게 일이 해결될 것이리라. 어쩌면 여기서 빠져나가 교토로 돌아가는 길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제가 나올때 급하게 나오느라 패를 다른 것을 가지고 온 것 같습니다만, 제가 바로 ‘소다 소바’의 주방장 ‘소다 타케루’입니다.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만… 그저 믿어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말 밖에 드릴 수가 없군요.”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며 고개를 숙이자, 순간 타케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어…, 갑자기 눈물이... 죄송합니다. 너무 맛있는 음식을 먹다 보니 그만.”
타케루는 점잖은 말투로 자신의 정체를 밝힘과 동시에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했다. ‘이 여자가 믿어주었으면’하고 간절히 빌던 찰나, 그녀는 굉장히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타케루를 마주보았다.
“정말 ‘소다 타케루’선생님 맞으세요? 몇 년 만에 뵈는 거라 못 알아봤어요! 혹시 저 기억 안 나세요? 일본으로 유학 온 한국 사람이요! 당시에 저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함께 목놓아 성토했잖아요! 그때가 아마…, 손님이 한 명도 없었던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저 모르시겠어요?”
여자는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며 ‘자신을 기억하냐’라는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타케루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소다 소바’를 찾는 손님이 몇 명인데 그 모두를 어떻게 일일이 기억할까. 하지만 그 순간, 기억 속의 누군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잠시만, 그 조선인?’
.....계속
작가:Mesh
편집자: 한투한 번역기, 자퇴생
ㅡ2026년 새해 입니다. 꾸준히 올리려 했는데 새해부터 잠시 삐그덕 거렸네용...ㅠ.ㅠ 다들 새해 목표 정하셨나요? 저희들의 올해 목표는 '최고의 맛을 찾아서' 완결입니다!
글을 읽어주신 독자님들! 붉은 말의 해에는 원하는 목표들 다~ 이루시길 바라겠습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o^)ㅡ